소 식
언론보도
한국 경제의 갈 길을 제시해 온 석학, 제16대 고려대 총장 이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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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7

대통령 후보들의 러브콜을 받아온 경제 학자
1997년 방송 3사 공동주최 대선 후보 토론회. 당시 주요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 김대중, 김종필 후보가 패널들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토론회가 진행됐다. 후보들은 상기된 얼굴로 패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애썼다. 패널은 각 방송사의 정치부장들과 함께, 외부 패널로 이필상 교수가 유일하게 참가했다. 그의 질문이 매서웠다.
“A 후보님은 경제 공부를 많이 하셨다고 하는데, 물가 상승과 실업 증가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우리 경제를 어떻게 살리실 계획이죠?” “B 후보님은 골프를 즐기신다고 알려져 있는데, 골프장에서 서민들 고통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지요?” 난감한 숙제를 받아든 학생처럼 후보들은 장황한 답변을 둘러댈 뿐이었다. 한 후보는 답을 하는 대신, 질문자인 이필상 교수가 한국 제일의 경제학자이니만큼 어떻게 하면 경제를 살릴 수 있냐고 거꾸로 되묻기도 했다.
그날 토론회의 주연은, 어떤 면에서 패널로 참가한 이필상의 차지였다. IMF 사태 이후 국민들의 절대적인 관심 속에 치러진 후보토론회에서 그는 가장 선명한 인상을 남긴 출연자였다. 긴장한 후보들과 달리 송곳 같은 질문을 하는 이필상 교수는 종종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는데, 토론회를 보도한 한 시사주간지는 이것을 트집 잡기도 했다. 그 일화에 대해 “제가 평상시에도 늘 웃는 표정입니다. 그날이라고 제가 뭐 특별했겠습니까?” 인터뷰를 청해 만난 자리에서도 그는 시종일관 밝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경제 현안에 대한 기고와 뉴스, 토론 프로그램에 자주 얼굴을 비치다 보니, 어느덧 경제전문가의 이미지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의 전공은 경영학, 그중에서도 파이낸스(재무) 분야다. 1980~90년대 한국 경제의 산적한 과제들을 풀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경영 전문가로 하여금 경제통을 자임하도록 만들었을 터다.
이필상은 교수직을 수행하는 틈틈이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여러 지면과 방송을 통해 제시해 왔다. 그러다 보니 정치나 자본에 대해 통렬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행보에 대해 주위의 우려와 견제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들은 곧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고, 이러한 노력이 인정받아 이후 여러 대선 캠프와 대통령 당선인으로부터 자신들의 정부에 들어와 일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때마다 정중히 거절하며 자신이 세운 학자의 원칙을 지켜왔다.
“평론가와 소설가는 다릅니다. 평론을 잘한다고 소설을 잘 쓰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학자로서 경제와 사회를 진단하고 나라 발전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에 만족합니다.”
고려대 경영대, 서울대 경제학부 최고의 인기 강의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이필상이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로 부임한 것은 1982년 가을학기부터다. 유학 시절 알게 된 지인의 추천으로 고려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아이비리그 명문대학 중 하나인 모교 컬럼비아 대학에서 3학기 동안 강의를 진행한 이력이 고려대로 부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필상의 강의는 첫 학기부터 많은 수강생들로 북적였다. 미국 유명 대학에서 선진 재무 이론을 전공한 젊은 교수의 수업을 듣기 위해 학생들은 치열한 수강 경쟁을 벌여야만 했다. 따라서 좌석 수가 234개인 경영관 501호 대강의실에서만 강의를 진행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침 수업을 듣기 위한 자리 잡기 싸움이 치열했고, 뒷자리에 서서 듣는 학생들로 강의실은 늘 북적였다. 한 과목 수강생이 468명에 이른 적도 있었다. 당시 고려대 경영대를 다닌 이들에게 그의 강의에 대해 물어보면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경영대 최고의 인기 강의였죠.”, “강의를 듣기 위한 앞자리 다툼이 치열했어요.” 그로부터 30~40년 뒤 서울대 경제학부에서도 수강생 250명이 넘는 최고의 인기 강의를 이어갔다.
“첫 시간에 서울대 공대를 나온 교수님이 경영학으로 전공을 바꾼 이유를 설명해주셨는데, ‘필상(弼商)’이라는 이름에 ‘상업을 도와야 한다.’는 운명이 들었기 때문이라 하셔서 모두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84학번 졸업생)
“당시 국내외 여러 이슈를 재무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경제에 미치는 영향까지 함께 풀어 설명해주셔서 피부에 와닿는 수업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친구들이 교수님 영향으로 대학원이나 직장을 선택할 때 재무나 금융 분야로 진출했을 겁니다.” (88학번 졸업생)
이필상의 강의 스타일은 당시 대학에서는 낯선 것이었다. 국제화 바람이 분 2000년대 이후에야 영어 강의가 독려 되었지만, 1980년대에는 영어로 강의하는 것이 비난을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탓에, 마땅한 한국어 개념어가 없거나 잘 몰라서 영어로 필기하고 우리말로 강의를 진행한 것은 당시로선 드문 일이었다. 채점한 답안지를 미리 나눠주고 학점을 사전에 공개한 방식도 획기적이었다.
“첫 학기 끝나고 선배 교수에게 혼이 났어요. 영어로 강의하고, 학생들에게 답안지와 학점을 미리 공개한 걸 지적하며 초임 교수가 학과 관행을 무시하고 너무 튄다는 거였죠.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수업하고 있습니다.”
그가 강의한 재무나 국제금융 같은 분야는 당시 우리 경제의 선진화를 위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었기에 학생들의 수강 열기가 높았다. 당시로선 생소했던 선물·옵션 같은 강의도 그러했다. 그가 고민해온 문제들이 우리 경제에 꼭 필요한 마중물로 작용했던 것이다.
대학원 제자들도 많이 두어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연구와 논문을 지도했다. 방학 때마다 집중세미나를 진행했고, 체력 관리를 위해 주말마다 함께 산행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가 배출한 석, 박사 제자만도 250여 명에 이른다. 제자들은 유명 금융회사를 비롯해 전국 대학 곳곳에서 유능한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인생의 손익계산서로 봤을 때 최대의 자산 항목이 제자들이라고 그는 말한다.
“대한민국 자본주의 만세!” - 금융실명제 실현과 한국은행 독립에 앞장서다
강의를 하는 틈틈이 이필상은 정치와 자본 권력을 비판하는 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의나 비리를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의도 이러한 사안들을 제시하고 대안을 함께 고민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사회비판적인 얘기를 꺼낼 때마다 학생들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곤 했다. 그의 신변을 걱정한 선배 교수가 주의를 주기도 했다. 사복경찰들이 학내에 상주하며 교수들 강의도 감청하던 시절이었다.
이필상은 자신의 경제, 경영 철학을 알리기 위해 여러 매체를 활용했다. 40여 년간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중단기 문제점을 지적한 칼럼만도 3,000건에 이른다. 1982년 터진 이철희, 장영자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사건 이후 정치권과 학계에서도 정경유착과 부동산 투기, 금융실명제, 토지공개념 등의 문제의식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1989년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이 탄생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 의해서다. 정부와 기업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던 이필상에게 경실련 같은 단체가 손을 뻗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실련에 참가한 여러 교수들의 면면과 그들의 활동에 공감해 결국 정책연구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경실련에서 이필상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중앙은행(한국은행)을 독립시키기 위한 서명 작업을 벌였다. 성명문을 전국 대학교수들에게 보내 회신을 받은 결과 1,054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이튿날 회의실을 가득 메운 기자들 앞에서 성명문을 낭독하며 느낀 흥분을 그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덕분에 이필상은 정부의 기피 인물이 됨은 물론 기업 자문위원이나 사외이사, 연구용역, 외부 강연도 끊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필상은 쉴 틈이 없었다. 한국은행 독립은 물론,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주장해 온 금융실명제도 차츰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면서 그는 각종 뉴스와 토론에 단골로 불려 나가게 되었다.
1993년 8월 12일의 일이다. 저녁을 먹고 연구실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KBS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정부에서 곧 중대 발표가 있을 거라며 방송국으로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방송 테이블에 앉자 TV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뭔가를 발표하는 모습이 보였다.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한다는 발표였다. 발표가 끝나자 사회자의 질문이 쏟아졌다. 금융실명제가 무엇이며 왜 실시해야 하는지, 금융실명제로 무엇이 달라지는지 등등. 신바람이 나서 대답했다. 방송국을 나오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한민국 자본주의 만세!”
당시 이필상이 토론이나 좌담회에 참가하기로 예정되면, 상대측 토론자가 급작스레 토론 불참을 통보하거나 이필상과의 대면을 거부하기도 했다. 토론에 나가면 정부와 기업을 대변하는 상대측 패널은 금융실명제나 한국은행 독립이 시기상조이며, 그로 인해 대단한 혼란이 일어나 경제가 멈출 거라는 논리를 펴곤 했다. “교수들은 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떠든다.”는 인신공격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들이 시행된 이후에도 큰 혼란이 없었던 건 주지의 사실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선 오히려 그렇지 않은 세상을 상상하기 어렵다.
서울대 출신으로 고려대학교 총장이 되다
1990년대 들어 고려대 경영대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시설이 낙후한 데다 연구, 교육 역량이 부족해 평판도 추락한 상황이었다. 공인회계사 합격자 수에서 경쟁 대학인 Y대의 60% 수준까지 떨어졌다. Y대 경영학과를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위기의식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교수들 사이에 위기감이 고조되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 일환으로 통합학장 안이 제시되었다. 그동안 따로 임명된 경영대학장과 경영대학원장을 일원화해 강력한 리더십 체제로 가야 한다는 데 대부분 동의했다. 곧 총장이 연공 서열대로 이필상을 지명했고, 교수협의회 표결 결과 찬성 25, 반대 2로 그가 초대 통합학장에 선출되었다.
1999년 2월부터 학장업무를 시작했다. ‘아시아 최고 수준의 경영대학으로 발전시킨다’는 목표로 21개 항의 발전전략을 내놓았다. 역점사업으로 경영대 건물의 대대적인 리모델링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30억 원에 달하는 자금을 충당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행운은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던 기업인 가문 출신 J의원을 초청해 특강을 열었는데, 강의를 마친 뒤 J의원에게 속마음을 터놓은 것이다. 진심이 통한 까닭일까, J의원은 숙고 끝에 리모델링 공사에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교수들이 환호했다. 단과대학 학장이 모금을 하는 것도, 그것도 3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모금한 것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해 10월 낡은 경영대 건물의 파괴가 시작됐다.
추운 날씨에도 열악한 상황을 참아준 학생들이 고마웠다. 공사를 진행하며 당초 예산을 훨씬 초과하는 견적이 제시됐지만, 이필상의 노력으로 모금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신축 건물이 완성될 즈음, 이필상은 제2경영관을 짓겠다는 새로운 플랜을 제시했다. 사회에서 활동하는 경영대 동문들 도움도 컸다. 사업의 의미에 공감한 재계 CEO들의 도움까지 가세해 제2경영관도 순조롭게 완성될 수 있었다.
일련의 노력과 상승된 분위기 탓일까, 2001년 대학 입시에서 1차 합격생 커트라인이 경쟁 학과인 Y대 경영학과보다 높게 나왔다. 고려대 경영대의 공인회계사 합격자 수도 다시 크게 늘기 시작해 현재는 국내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다.
통합학장 임기를 마친 뒤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곧 시작될 제15대 고려대학교 총장직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의 리더십을 잘 알고 있던 동료 교수들이 그에게 총장 후보로 나설 것을 제안했다. 당시 고려대는 타 대학 출신이 총장이 된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학연이나 지연이 전무한 상태로 맨발로 뛰어다니며 안암과 서창캠퍼스의 교수들을 만났다. 6개월쯤 뒤엔 900여 명 교수 대부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언론 활동을 통해 인지도가 높았던 것과 경영대 발전에 대한 소문이 더해져 많은 교수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이필상은 2002년 총장 후보를 사퇴하게 되었다.
2006년 11월 20일은 이필상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제16대 고려대학교 총장에 공식 선출된 것이다. 고려대 출신이 아닌 총장이 나온 것은 1980년대 김준엽 총장 이후 21년 만이며 서울대 출신으로는 최초였다. 타 대학 출신으로 총장이 된 기쁨과 책임감에 대해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려대에 와서 교편을 잡은 지 24년입니다. 비록 학부는 고려대에서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진정한 고대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임기 동안 고려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만들겠습니다. 상품을 수출하면 달러를 벌지만, 학문을 수출하면 나라를 얻습니다. 고대를 학문을 수출하는 대학으로 만들겠습니다.”
최초의 서울대학교 출신의 고려대학교 총장. 이필상을 대표하는 한 줄 이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필상의 총장 임기는 짧았다. 이듬해인 2007년 2월 23일, 고려대학교 제100회 학위수여식(졸업식)을 마친 뒤 그는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과정의 경과와 시시비비는 본 지면에서 세세히 다룰 만큼의 분량과 내용을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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